이기영 (소설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기영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이다. 아산 출생으로, 필명은 민촌이다. 일본 유학 후 카프(KAPF)에 참여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옹호하며, 조선지광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탄압을 겪고 친일 행적을 보였으나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문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주요 작품으로 농촌의 현실을 그린 소설 《고향》, 《홍수》, 《서화》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이태준
이태준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로, 섬세한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현실을 그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주목받았으며, 특히 1930년대 〈달밤〉, 〈까마귀〉, 〈복덕방〉 등의 작품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월북 후 숙청되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 이태준
이태준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로, 섬세한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로 현실을 그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주목받았으며, 특히 1930년대 〈달밤〉, 〈까마귀〉, 〈복덕방〉 등의 작품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월북 후 숙청되어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 윤보선
윤보선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국민주당 창당,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 역임, 제2공화국 대통령 역임, 그리고 민주화 운동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이기영 (소설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관 | 삭녕 이씨(朔寧 李氏) |
출생 | 1896년 5월 29일 |
출생지 | 조선 충청남도 아산시 |
사망 | 1984년 8월 9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직업 | 소설가, 작가 |
가족 | |
배우자 | 이름 정보 없음 |
자녀 | 정보 없음 |
학력 | |
모교 | 정보 없음 |
작품 활동 | |
장르 | 소설 |
분야 | 정보 없음 |
대표작 | 고향 |
기타 | |
서명 | 정보 없음 |
2. 생애
이기영은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나 '민촌'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일본 도쿄 세이시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25년 카프(KAPF)에 가입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울 조직자 및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 지도자로 활동했다.[1] 192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옹호하는 잡지이자 조선 공산당 기관지인 《조선지광》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했다.[1]
일제강점기에 이기영은 2년 이상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2]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문학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북한 문학예술총동맹에서 오랫동안 주요 직책을 맡았다. 1984년 8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2. 1. 유년 시절과 초기 활동
이기영은 1896년 5월 6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민창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였다. 태어나자마자 천안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이기영의 가정은 가난했고, 이기영이 11세(만 10세)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학비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가난한 가운데, 고대 소설을 읽으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06년, 사립 영진학교에 입학했다. 영진학교는 이기영의 아버지가 개화 사상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학교였다. 이기영은 학교에서 신소설을 접했다. 또한 신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1917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했다. 1921년 4월, 이기영은 적은 돈을 모아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에서 고학했지만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의 혼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2]2. 2. 카프(KAPF) 활동과 문학적 성취
이기영은 1924년 『개벽』에 「오빠의 비밀 편지한국어」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1] 1925년 조명희의 권유로 『조선지광』 편집 기자로 취직했고, 같은 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여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역임했다.[1] 그는 이광수, 김동인 등과 대립하며 빈민의 현실을 직시하는 계급 의식이 높은 문학을 지향했다.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조선 문단을 휩쓸던 KAPF를 탄압했다. 이기영은 제1차 KAPF 일제 검거 때 2개월간 구속되었고(집행유예로 석방), 제2차 KAPF 일제 검거 때는 1년 6개월 동안 투옥되었다.[1] 이 시기, 이기영은 『조선일보』에 대표작 「고향」을 연재하며 빈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1]
2. 3. 친일 행적 논란과 월북
이기영은 제2차 KAPF 일제 검거 이후 전향 작가로 활동하거나, 조선문인협회에 참여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2] 1944년에는 강원도 철원에 은거했다.1945년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이기영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참여하며 좌익 문학 활동을 재개했다. 동시에 강원도 인민위원회 교육부장, 북조선예술동맹 명예위원장,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장, 북조선임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진영과 대립했다.[2] 한국 전쟁 이후에도 북한에서 문단의 원로로 활동하며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최고위원회 부의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소문화협회 회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2]
2. 4.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
1945년 일본 패전 후, 이기영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참여하여 좌익 문학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강원도 인민위원회 교육부장, 북조선예술동맹 명예위원장,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장, 북조선임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진영과 대립했다.[2] 한국 전쟁을 거쳐 남북 분단 이후에도 문단의 원로로서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최고위원회 부의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장, 조소문화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장남 이평은 김정일의 첫 번째 부인 성혜림의 남편이었고, 차남 이종혁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2]1984년 8월 9일, 병으로 사망했다.[2]
3. 작품 세계
이기영은 프롤레타리아 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에 억압받는 가련한 농민들의 삶을 탐구했다.[2] 《홍수》와 《서화》는 "농민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며, 프롤레타리아적 시각으로 농촌의 고난 현실을 묘사한다. 특히 《서화》는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재산 계급의 일부라는 이중적 본성을 날카롭게 관찰한다.[2]
당시 농민 문학에 대한 논쟁은 농민과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나, 이기영은 식민지 자본주의 하에서 농민은 더 이상 통일된 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은 억압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갖춘 극빈 농민을 계급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적합한 동지로 규정한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그의 대표작 《고향》에서 완성되었다.[2]
이기영은 북한에서 활동한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남한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에서는 작가들의 자세한 생물학적 정보가 독자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3]
3. 1. 초기 작품 경향
이기영은 초기에는 현실 고발적 성격이 강한 단편소설을 주로 창작하였다. 1924년 개벽에 발표한 「오빠의 비밀편지한국어」를 시작으로, 「가난한 사람들한국어」(1925), 「민촌한국어」(1925), 「쥐 이야기한국어」(1926) 등에서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2] 이러한 초기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 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이기영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에 억압받는 가련한 농민들의 삶을 탐구했으며, 특히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재산 계급의 일부라는 이중적 본성을 날카롭게 관찰했다.[2]발표 연도 | 작품 제목 | 발표 지면 |
---|---|---|
1924년 | 오빠의 비밀편지한국어 | 개벽 |
1925년 5월 | 가난한 사람들한국어 | 개벽 |
1925년 12월 | 민촌한국어 | 조선지광 |
1926년 1월~2월 | 농부 정도룡한국어 | 개벽 |
1926년 | 쥐 이야기한국어 | 문예운동 |
1926년 9월 | 외교원과 전도부인한국어 | 조선지광 |
3. 2. 대표작 『고향』
이기영의 대표작 《고향》은 조선일보에 1933년 11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연재된 장편소설이다.[2] 이 소설은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1930년대 농민소설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2] 《고향》은 고향으로 돌아와 억압받는 농민을 계몽하는 데 헌신하는 지식인에 초점을 맞춘다.[2]한국문학번역원은 이기영의 문학적 기여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문학 진영의 대표 작가로서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에 억압받는 가련한 농민들의 삶을 탐구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작품은 억압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갖춘 극빈 농민을 계급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적합한 동지로 규정하며, 이러한 견해는 《고향》에서 완성되었다고 설명한다.[2]
3. 3. 그 외 주요 작품
이기영은 프롤레타리아 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에 억압받는 가련한 농민들의 삶을 주로 다루었다.[2] 그의 작품들은 식민지 자본주의 하에서 농민이 더 이상 통일된 계급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억압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갖춘 극빈 농민을 계급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적합한 동지로 규정했다.[2]4. 평가 및 비판
이기영은 일제강점기 농민과 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프롤레타리아 문학, 특히 농민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대표작 『고향』은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2]
한국문학번역원은 이기영이 지주와 식민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받는 농민들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그의 작품들이 프롤레타리아적 관점에서 농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특히 《서화》는 농민이 가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재산 계급으로서의 이중적인 모습을 날카롭게 관찰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억압을 직접 경험한 가난한 농민들이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계급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동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2]
4. 1. 긍정적 평가
이기영은 일제강점기 빈농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농민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고향』을 통해 문학사적 업적을 남겼다.[2]한국문학번역원은 이기영이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에 억압받는 가련한 농민들의 삶을 탐구했으며, 그의 작품들이 프롤레타리아적 시각을 통해 농촌의 고난 현실을 묘사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서화》는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재산 계급의 일부라는 이중적 본성을 날카롭게 관찰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억압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갖춘 극빈 농민을 계급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적합한 동지로 규정한다고 평가했다.[2]
5. 작품 목록
이기영은 장편소설로 《고향》(1934), 《땅》(1949), 《두만강》(1954-1961)을 발표했다.[1] 단편 소설로는 「오빠의 비밀편지」(1924), 「가난한 사람들」(1925), 「민촌」(1925), 「농부 정도룡」(1926), 「쥐 이야기」(1926), 「홍수」(1930), 「서화」, 「봄」(1940) 등이 있다.
5. 1. 장편소설
5. 2. 단편소설
이기영의 단편 소설로는 「오빠의 비밀편지한국어」 (1924년), 「가난한 사람들한국어」 (1925년), 「민촌한국어」 (1925년), 「농부 정도룡한국어」 (1926년), 「쥐 이야기한국어」 (1926년), 「홍수한국어」 (1930년), 「서화한국어」, 「봄한국어」 (1940년) 등이 있다.참조
[1]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2]
웹사이트
Lee Giyeong
http://klti.or.kr/ke[...]
LTI Korea
2013-09-21
[3]
웹사이트
Benoit Symposium: Writers in the DPRK: The Invisible Stars
http://sinonk.com/20[...]
2013-09-27
[4]
논문
A creative way to Lee Ki-Yong
1960
[5]
논문
The life and work of Lee Ki-Yong
1962
[6]
논문
New Fiction of Korea
Nauka
198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